[고영건의 교육나침반 ]미래교육으로 가는 길(8) 젠틀맨이 이끌어온 위대한 영국

교양교육 없이는 통합의 리더도 없다

  • 기사입력 2023.11.06 09:31
  • 최종수정 2023.11.07 15:19
  • 기자명 OBC더원방송
▲ 고영건 (주)위키스터디 CEO
▲ 고영건 (주)위키스터디 CEO

원래 ‘교양’이란 단어는 독일어 ‘Bildung’을 번역하기 위해 일본에서 만든 신조어로, ‘나무를 깎아 형상을 만든다’는 뜻의 인도유럽어 ‘bil-’이라는 음절로부터 유래한다. 근대 유럽의 교육에서 인격 형성의 과정을 의미하던 Bildung은 20세기에 들어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혼용되면서 그 의미가 더욱 구체화되었다. 리버럴 아츠라는 말은 고대 라틴어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에서 유래한다.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는 ‘자유 시민을 위한 학문’이란 뜻이며, 교육학에서는 이를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결국 교양이란 ‘인간 정신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배우는 폭넓은 학문’인 것이다.

리버럴 아츠는 인문학을 토대로 하는 자유로운 정신과 성찰적 인격의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대학 교양과정으로서의 리버럴 아츠 또한 자유시민으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이다. 탈산업화와 정보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하버드대를 비롯한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서는 실용적이고 전문적인 지식교육보다 리버럴 아츠를 우선시하고 있다. 창의와 융합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자유로운 사고와 소통, 협력의 인격을 갖춘 인재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주입식 교육과 과열된 입시로 인해 우리 교육에서는 교양교육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저급한 선동이 난무하는 심각한 일차원적 사회(마르쿠제의 개념으로 전체주의 사회를 의미함)로 치닫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이다. 혐오 정치가 위험 수위를 넘어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양교육의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 토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는 국가 교육의 목표를 젠틀맨(교양인) 양성에 두고 교양교육의 토대를 다져온 영국 교육에서 그 방법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다.

영국의 교양인, 젠틀맨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국의 주입식 교육은 지식의 효율적인 축적을 단시간에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주입식 교육의 한계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거나 토론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열린 사고와 포용적 인격을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단순히 습득하고 정답과 오답만 분별하는 방식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은 자유로운 본성마저도 획일화의 틀에 갇히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로운 사고를 형성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율과 책무의 균형을 주체적으로 인지하고 실천하는 성숙한 인격을 함양할 수 없다.

수십 년간 누적된 주입식 교육이 불러온 결과는 현재 한국 사회의 미성숙한 대중 집단주의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사회적 관계망 곳곳에서 시민사회의 합리성을 마비시키는 섬뜩한 전체주의의 광기가 표출되고 있다. 교양교육을 도외시한 결과의 현현을 목도하며, 더 이상 교양교육은 선택사항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교양교육의 첫걸음은 글쓰기와 토론을 통한 자유로운 사고와 성찰적 인성 함양을 목표로 하는 교육과정의 혁신이다.

영국 교육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토론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교양교육을 지향한다. 유아교육의 단계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교육을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한 글쓰기는 영국 교육의 핵심 요소인 논술형 평가의 토대가 얼마나 단단한가를 짐작하게 한다. 영국의 교육은 학습 과정도 그렇고 평가에서도 주어진 선택지에서 답을 고르는 객관식 시험이 없다. 대학 준비 과정(Sixth form college)으로 가기 위한 GCSE(중등교육 졸업 시험)와 A-level(대학 입학 시험) 모두 논술형 평가이다. 누대에 걸쳐 축적된 영국의 교육관은 글쓰기와 토론을 통해 지적 호기심과 자유로운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다. 즉 학교 교육의 목적이 교양의 토대 위에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요구되는 인성을 기르는 것이다.

영국 학생들은 유아교육부터 논술형 교육을 받고 토론 문화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 영국의 언론 매체들도 민감한 정치 이슈에 대해 격렬한 토론 문화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특히 BBC방송의 토론과 시사 프로그램은 영국 사회의 품격을 대변한다. ‘가디언’과 ‘타임스’는 진보와 보수진영의 대척점을 이루고 있지만, 그 논조와 비판은 진영을 넘어 교양 있는 시민들의 신뢰를 받기에 충분하다. 교양 있는 시민이 품격 있는 언론을 만든다는 당연한 사실이 너무나 커 보인다. 학교 수업에서 토론 문화를 습득하는 영국 학생들은 상대방 의견을 반박하면서 반대 논리의 핵심 근거를 숙고하게 된다. 아울러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는 교양을 기르게 된다.

교양교육은 일방적으로 가르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글쓰기와 토론의 과정에서 스스로 체득하고 형성해가는 교육을 말한다. 영국 교육도 전통으로 뿌리내린 리버럴 아츠가 자연스럽게 유아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공립학교와 명문 사립학교 모두의 공통된 교육 문화로 작용한다. 영국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교육 격차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계층 분리라는 매우 무거운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영국 사회가 우리보다 갈등의 골이 깊지 않은 것은 교양교육의 영향이 크다. 영국은 대다수의 공립학교에서도 토론을 기반으로 하는 교과 과정 외에도 인문 교양을 형성하는 예체능과 연극 활동 등 비교과 교육에 힘쓰고 있다. 명문 사립학교들 또한 특권층 자녀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통해 국가에 대한 책무를 가르치는 젠틀맨 교육을 실천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튼 칼리지(Eton college)나 해로 스쿨(Harrow School) 같은 중고등학교와 예비학교인 드래건 스쿨(Dragon School)은 영국을 이끌어온 각 분야의 리더들을 길러낸 명문 사립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사립학교들은 대부분 보딩스쿨(기숙학교)이고 생활 규율도 매우 엄격하다. 교육의 목표 또한 입시 실적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단련’에 둔다. 이튼 칼리지는 영국의 역대 수상 20명을 배출했다. 이들이 이튼을 회상할 때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튼은 좋은 철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뜨거운 용광로였다.” 이처럼 이튼 스쿨은 엄격한 규율과 젠틀맨 교육으로 책무 의식과 국가를 위해 가장 먼저 헌신할 것을 영국의 리더들에게 가르쳤다. 이튼 칼리지 졸업생들이 스스로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이 1‧2차 세계대전에 1만 명 이상의 동문이 참전했고, 1900명 이상이 전사했다는 것이다. 국가를 이끌 리더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철저하게 가르치는 이튼 칼리지의 교양교육은 영국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교양인을 길러내야 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이 된다

한국 정치는 이미 국가의 중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경제 규모와 산업의 발전 정도를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대의민주주의의 왜곡이 심하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국민의 대표자들이 의회 민주주의를 운영할 교양과 도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의회에서 벌어지는 유례를 찾기 힘든 ‘다수의 횡포’는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마저 무시하고 있다. 정당 정치는 어떠한가? 정당의 본래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게 되는 이념 광신도 단체로 전락했다. 1인 지배의 사당화는 물론이고 광적인 강성 세력들의 과두정치는 저급한 증오 감정으로만 작동하고 있다. 이 정도면 플라톤이 경멸했던 대중민주주의의 가장 야만적인 형태로, 그 이상을 상상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몇 년 전, 트럼프 강성지지 세력의 의사당 난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미국 사회도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 이 사태를 진단하는 미국의 지성들은 그 근본적인 원인을 미국의 교육 붕괴에서 찾았다. ‘분노 정치’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것의 원인도 교육의 붕괴에서 찾을 수 있지만, 유일한 해결 방안 또한 교육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 감정의 표출을 막는 방법은 교양을 갖춘 시민들이 더 많아져서 집단주의의 야만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집단 지성을 공고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교육은 지식과 기능을 닦은 인재들을 사회에 공급하는 역할보다 의사소통의 규범을 알고 공공선을 위한 책무를 다하는 교양인을 길러내는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위기는, 한 명의 영웅이 기적같이 나라를 구해내는 판타지에 기댈 만큼 녹록하지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교육의 목표를 바꾸어야 한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토론과 글쓰기를 통해 자유로운 생각과 교양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교양 있는 시민들이 많아야 통합의 지도자를 만들 수 있다.

나는 영국을 생각할 때,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는 큰 훈장보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라는 이름표가 더 부럽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제3의 길의 토니 블레어, 이 통 큰 리더들 모두가 엄격한 교양교육으로 길러진 젠틀맨 중 하나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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