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海時論]해상왕 장보고(張保皐)와 동북아시대의 화두, 황해경제권

  • 기사입력 2019.11.05 11:09
  • 최종수정 2023.03.31 13:22
  • 기자명 김승환 기자

서기 755년(경덕왕 14)부터 9년 동안 지속된 당나라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이 일으킨 안사(安史)의 난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신라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동아시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세계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수립되어 가던 9세기 무렵, 산동성과 한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시대를 연 해상왕 장보고.

 

그로부터 1200년이 지난 지금, 환황해경제권의 부활과 잠재력이 새로운 경제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특히 혁신가로서의 장보고의 성과물을 통해 기존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혁신적 모습을 경영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동북아시대의 화두, 황해경제권

 

산둥(山東)반도는 중국화북평원의 동쪽에서 동해를 면한 반도로 랴오둥(遼東)반도와 마주보면서 발해만을 감싸고 있다. 면적은 15만7천㎢로 중국 전체의 1.6%에 불과하나, 황하하류의 넓은 평야지역으로 인구는 9천7백만 명이나 살고 있고 GDP도 중국내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성이다.

 

이곳의 성도는 지난(濟南)이며 칭다오, 웨이하이, 옌타이 등 우리에게 낯익은 항구가 위치하고 있다. 산둥반도 동쪽 끝의 룽청(영성)은 평택과 비슷한 위도로 거리가 372㎞에 불과해 ‘영성의 닭 울음소리가 서해안까지 들린다’ 는 옛말이 있다.

 

최근 들어 산둥지역과 우리의 관계가 눈에 띄게 활발해지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제1위 투자국이고 산둥성은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가장 많이 진출한 지역이다. 이 지역 누적 투자액은 92억불로 총 중국 투자액의 사분의 일에 달하며 약 7700개의 한국기업(누계·신규법인)이 진출해 있다. 한국과의 교역규모는 328억불로 우리나라 10대 교역국 수준이며, 교민도 8만8천명에 달한다.

 

산둥지역은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가깝고 경제적으로 상호보완 효과가 클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가깝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중국 산둥성 웨하이(威海)에는 적산법화원이 있다. 9세기 무렵, 산둥반도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인 신라방에 장보고가 세운 절이다.

 

중국은 2002년부터 적산법화원 내부에 3000만위안(약 52억 원)을 투자해 2007년 장보고 기념관을 완공했다. 영성시에 따르면 이곳 장보고 기념관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은 5만명 수준이지만 중국인 방문객은 20만명이 넘고, 많이 찾을 때는 50만 명에 육박하기도 한다. 한국인들보다 오히려 중국인들이 장보고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설명이다.

 

장보고는 9세기 한·중·일을 바닷길로 연결해 도자기와 비단, 약초, 차 등 고가품은 물론 생활용품 등 까지 다양한 물품을 실어 날랐다. 덕분에 한·중·일 3국의 정사(正史)에 기록되는 유일한 인물이 됐다.

 

특히 중국의 당서(唐書)와 두목(杜牧)이 쓴 번천문집(樊川文集)에는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했던 과정 등을 상세히 기록했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심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하여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가 지금에 까지 미치고 있는 셈이다.

 

장보고는 당시 한국과 중국을 잇는 대사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한국과 중국의 무역이 활발해졌다면, 한ㆍ중 FTA 시대를 맞아 그의 상징적인 존재와 역할이 새삼 주목받을 것이란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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